추리, 공포, SF를 망라한 미발표 작품집 한국에서 최초 공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일본 서점 대상 2위, 일본 추리작가협회상과 야마다 후타로상을 석권하고 국내에서도 1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제노사이드』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최신작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가 일본보다 앞서 한국에서 첫선을 보인다. 20여 년간 7편의 장편소설과 1편의 연작 소설집을 출간해 온 작가에게는 사실상 첫 단편집으로서의 의의를 띤 작품집으로, 미스터리에서 공포와 SF까지 아우르는 여섯 편의 수록작 중 네 편은 여태 일본을 포함해 어느 지면에서도 공개된 적이 없는 미발표작이다. 각 수록작은 그간의 장편소설들에서 사형 제도부터 신인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상상력을 선보인 저자의 사고실험을 보는 듯한 감각을 선사하는 동시에, 속도감 넘치는 전개에 탁월한 스토리텔러의 솜씨를 여실히 드러낸다. 『제노사이드』 출간 당시 여러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 깊은 애정을 보인 저자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줄곧 따뜻하게 성원해 주셨던 여러분께 가장 먼저 선보일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쁘고 명예롭게 생각합니다.”라며 출간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출간을 맞아 저자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국 독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객관적 사실에서 한 발짝 물러날 때,
불가사의한 세상은 그 진상을 비로소 드러낸다
비현실적인 요소를 전제로 한 특수 설정 미스터리가 최근 장르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지만, 다카노 가즈아키는 이와는 다소 결이 다른 방식으로 초자연적 소재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여섯 편의 단편 중 네 편이 유령 혹은 죽은 자의 기억을 소재로 다루는데, 그림자처럼 이야기의 배경에서 부유하던 그들의 존재감은 전개에 따라 점차 선명해지며 현실적인 사건의 난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논리 전개를 위한 트릭으로서 활용되기보다는 한때는 살아 있던 사람이었을 개개인의 사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수록작 「발소리」는 심야의 귀갓길에 들려오는 환청이 주는 공포가 긴장감 넘치게 그려지며, 표제작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의 자백을 받아 내려는 형사의 계책이 펼쳐지는 가운데, 사건 현장에서 퍼지는 유령 목격담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세 번째 남자」에서는 꿈속에서 본 교통사고로 죽은 남자의 기억에 사로잡힌 여성이 남자의 마지막 유언을 유족에게 전하려다 그 사고의 진상에 다가가게 된다. 수록작 중 가장 나중에 쓰인 「아마기 산장」은 1958년의 전후(戰後) 일본을 배경으로 소위 ‘유령 저택’이라 불리는 건물과 광기에 찬 과학자의 사연을 파헤치는 기자의 추적을 통해 시대의 광기가 만들어 낸 “사람의 모습을 띤 괴물”의 형태를 그려 낸다.
미스터리와 초자연을 잇는 깊이 있는 시선
사형 제도와 현대 국가의 범죄 관리 시스템에 의문을 던진 데뷔작 『13계단』 이래 다카노 가즈아키에게는 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으며 SF인 『제노사이드』에서도 디테일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주목을 받았다. 그렇기에 유령이란 존재를 위화감 없이 당연한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작품이 다수 수록된 이번 단편집이 의외로 다가올 수도 있으나, 사실 저자의 다른 작품들에서 초능력이나 빙의 같은 요소가 주요하게 등장하였으며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던 전작 『건널목의 유령』도 본격 심령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도 약자라는 위치에 놓여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간 이들에 대한 연민과 인간의 악의에 관한 탐구라는 테마를 저자 특유의 흥미진진한 플롯 속에 녹여 내었으며, 이번에 출간되는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재나 플롯 면에서 저자의 다른 작품들과의 연결 지점을 찾아보게 되는 묘미도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를 사랑해 온 한국 독자들에게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좀 더 확장된 시선으로 작가의 작품들을 돌아보게 하는 선물 같은 단편집이 될 것이다.
▷작품별 줄거리
발소리(2015)
오랫동안 다닌 회사에서 해고당한 사와키는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에게서 이직 자리를 알아봐 주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며 기묘한 얘기를 듣는다. 귀가할 때마다 어떤 발소리가 자신을 따라오는데, 그것이 진짜인지 환청인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의문의 발소리는 사와키에게도 들리기 시작한다.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2012)
젊은 여성이 실종된 후 고즈넉한 지역의 한 사찰 묘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특별한 물증도, 동기도 찾지 못해 수사는 난항을 겪는다. 담당 형사인 후루키는 실종을 신고한 피해자의 연인을 의심하며 결정적 단서를 얻기 위해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한편, 문제의 사찰에서는 홀연히 나타난 유령의 목격담이 잇따르는데.
세 번째 남자(2013)
교통사고로 죽어 가며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남자가 되는 꿈을 꾼 마리코. 너무나 생생한 내용에 29년 전 죽은 어떤 청년의 영혼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사로잡혀 사고 현장까지 찾아가 본다. 그곳에서 우연히 조우한 청년의 어머니와 친우로부터 사고 정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듣다가 석연치 않은 부분을 깨닫는다.
아마기 산장(2017)
기자인 하야미는 부동산 업자인 친구로부터 기묘한 사연을 지닌 건물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건물은 이즈반도 아마기 산맥 가장자리에 위치한 산장으로, 원 소유자인 제국대학 해부학 교수는 7년 전 행적이 묘연해졌다가 최근 실종 선고가 확정되어 법원이 사망을 인정했다. 그런데 상속자인 조카의 말에 따르면 그곳은 교수의 기묘한 집념이 얽힌 ‘유령 저택’이라고 하는데.
두 개의 총구(2004, 앤솔러지 『적색의 수수께끼(赤の謎)』에 수록)
학교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시야마가 퇴근하려던 찰나, 총성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의 방화 셔터가 내려온다. 이윽고 인근에서 엽총으로 네다섯 명을 사살한 무차별 살인범이 도주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들려오고, 패닉에 빠진 이시야마는 낯선 남자와 맞닥뜨린다.
제로(2007, 앤솔러지 『오전 0시(午前零時)』에 수록)
2054년, 미국 뉴멕시코. 해변에서 한 남자가 기억을 잃은 채로 눈을 뜬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기관으로 인도된 남자는 ‘제로’라는 새 이름을 얻고 현실에 적응해 가지만, 자신을 알고 싶다는 갈망으로 인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한다.
다카노 가즈아키 高野和明
1964년 도쿄 출생. 어린 시절부터 영화감독을 지망하여 독립영화를 제작하고는 하였으며, 고등학교 시절 2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대학 재수 시절 완성한 각본이 일본 영화 제작자 연맹에서 주관하는 기도상 최종 후보에 오른 인연으로 영화감독 오카모토 기하치의 문하에 들어갔다. 1984년부터 영화와 텔레비전 촬영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고, 1989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시티 컬리지에서 영화 연출과 촬영, 편집을 공부했다. 1991년 귀국한 뒤에는 영화 및 텔레비전 각본가로 활동하다가, 2001년 『13계단』으로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란포상 심사위원이었던 미야베 미유키는 “도저히 신인 작가라고 믿을 수 없다. 주도면밀한 구성과 탄탄하고 이지적인 문장에 읽을 때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며 극찬했다. 이후 단편집인 『6시간 후 너는 죽는다』가 드라마로 제작되었을 때는 직접 각본을 담당했으며, 그중 한 에피소드인 「3시간 후 나는 죽는다」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2011년 출간된 대작 『제노사이드』로 야마다 후타로상과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랭킹 1위와 일본 전역의 서점 직원이 직접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을 선정하는 ‘일본 서점 대상’에서 2위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2022년, 『제노사이드』 이후 11년 만에 출간한 장편소설 『건널목의 유령』으로 이듬해 제169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귀국해,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13계단』, 『그레이브 디거』, 『붕대클럽』, 『버스탈취 사건』, 『헤이세이 머신건스』, 『순수의 영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